여러분 대단히 반갑습니다.
‘KAIST 신소재부품 산학협의체’의 구성과 첫 회의 개최를 진심으로 축하드리며, 오늘 이 자리에 함께하신 기업 대표와 관계자 여러분께 충심으로 감사드립니다.
「KAIST 신소재연구기획단」의 단장으로 리더십을 발휘하며 오늘 산학협의체 회의를 준비하신 김상욱 교수님을 비롯한 여덟 분의 기획단 참여 교수님과 테이블마다 기업인들과 함께 자리하고 계신 여러 교수님께도 감사드립니다.
회의 시작과 함께 참석하신 모든 분을 일일이 소개해 드릴 기회를 갖게 된 나름의 이유가 있습니다. 과거 무력이 주도하던 시대에는 군인이 나라를 지키는 전사였지만 4차 산업혁명 기술패권 시대에는 여러분과 같은 과학기술인이 나라를 지키는 최선봉에 서 있기 때문입니다.
세계경제포럼(World Economic Forum, WEF)의 창시자인 클라우스 슈밥 회장은 2016년 다보스 포럼에서 4차 산업혁명이 인류사회에 쓰나미처럼 몰려올 것이라는 전망을 제시했습니다.
지난 7월 일본이 반도체와 디스플레이 제조에 필수 소재인 고순도 불화수소, 포토레지스트, 플루오린 폴리이미드에 대해 수출규제 조치를 발표하고 8월에는 우리나라를 White List에서 제외하기로 결정함에 따라 촉발된 한일 무역·외교전쟁을 목도하며 저는 4차 산업혁명 쓰나미의 실체가 기술패권이라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기술패권 시대에 국력은 산업경쟁력에 비례하며 산업경쟁력은 과학기술력에 근간을 둘 수밖에 없기 때문에 한일 무역·외교전쟁의 승패 역시 정치적 협상이나 외교적인 타협이 아닌 과학기술 기반의 산업경쟁력 확보에 달려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이런 측면에서, 과학기술계에 몸담고 계신 여러분 각자에게 부여된 책임은 기술패권을 둘러싼 글로벌 경쟁에서 우위를 점해 나라를 지키는 것이며, 이러한 역할은 군사력으로 나라를 수호하는 장성급 군 지휘관에 버금갈 만큼 중요해졌다고 생각합니다.
7월 4일 일본이 세 가지 핵심 소재에 대한 수출규제를 발표했을 때만 해도 저는 어느 정도 위기 극복이 가능할 것이라는 낙관적인 전망을 했었습니다.
하지만, 8월 2일 금요일 White List 제외 조치가 발표되고 1,200여 개의 품목이 일본 수출규제의 영향을 받게 될 것이라는 소식을 접한 직후에는 국가적으로 큰 어려움에 직면하게 될 국난(國難)으로 여겨 우려를 금할 수 없었습니다.
이러한 우려가 현실이 되지 않도록 KAIST가 앞장서야 한다는 신념하에 당일 오후에 긴급 간부회의를 소집하고 『KAIST 소재·부품·장비 기술자문단(KAIST Advisors on Materials & Parts, KAMP)』출범을 결정했습니다.
8월 3일 토요일 밤에는 전체 교수님에게 KAIST가 국가적 난국의 타개에 일조하고 위기 극복을 향한 희망의 메시지를 국민에게 전해 주기 위해 『KAIST 소재·부품·장비 기술자문단』의 출범을 결정했음을 알리며 참여와 협조를 당부했고, 130여 명 교수님의 자발적 참여 의사를 확인한 후 최성율 교수님을 단장으로 기술자문단의 조직구성과 구체적인 역할을 확정해 곧바로 활동을 개시했습니다.
일본 수출규제의 영향을 받게 된 중소·중견기업을 지원하기 위한 기술자문단의 출범은 『KAIST 소재‧부품‧장비 기술자문단』이 과학기술계 최초의 사례며, KAIST의 기술자문단 출범이 도화선이 되어 전국의 대학과 연구기관들이 일본의 수출규제로 영향을 받게 된 기업을 지원하겠다는 노력에 동참해 유사한 자문단을 발족하기에 이르렀습니다.
이번과 같이 대학 교수님들이 자발적으로 중소·중견기업에 조력을 제공하겠다고 앞장선 사례는 유례를 찾기 힘들며, 일본의 수출규제 확대로 인해 산업계가 입을 타격에 대한 위기의식을 대학도 공유하고 있음을 방증합니다.
특히, KAIST가 국가적 위기 극복을 위한 소재‧부품‧장비 분야 기술 발전을 도모하며 중소·중견기업 지원을 위한 선도적 역할 수행을 주저하지 않았던 이유는 KAIST의 설립 취지와 사명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1971년 설립 이래 KAIST는 지난 반세기 동안 국가가 필요로 하는 과학기술 인재양성과 연구개발 수행이라는 ‘임무 중심 (Mission-oriented)’ 대학으로서의 역할을 수행해 왔으며, 수출규제로 어려움을 겪게 된 중소·중견기업을 지원하는 것은 임무중심 대학인 KAIST에 주어진 당연한 시대적 사명입니다. 『KAIST 소재‧부품‧장비 기술자문단』은 총장 이하 KAIST 전체 구성원들이 이러한 사명을 성실히 수행하겠다는 의지와 구체적인 실천을 입증하는 좋은 사례라고 생각합니다.
일본의 수출규제로 촉발된 이번 사태는 단기적으로는 국가적 위기임이 분명하지만, 장기적으로는 우리에게 새로운 기회가 될 수 있을 것으로 전망합니다. 냉정한 시각으로 우리나라 산업 구조와 경쟁력을 다시 한 번 살펴보며 실상을 조명할 수 있는 중요한 계기를 제공했기 때문입니다. 구체적으로, 세 가지 측면에서 우리나라 산업 전반의 실태를 명확히 파악할 수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첫 번째는, 반도체와 스마트폰 및 디스플레이 등 첨단기술 기반의 완제품 시장에서 국내 대기업들이 차지한 글로벌 경쟁력에 지나치게 도취되어 제조업의 밑바탕을 이루는 허리산업과 뿌리산업의 육성에는 소홀했음이 명백해졌습니다.
이에 따라 소재·부품·장비 기업을 중심으로 한 국내 제조업 기반은 점차 약화하여 외부 충격에 무방비로 노출될 수밖에 없게 되었음을 절감하게 됐습니다.
두 번째는, 4차 산업혁명 시대가 승자 독식(Winner takes all.)의 시대이며 이러한 상황은 국내 및 해외 특정기업이 각각 독점하고 있는 메모리 반도체, 디스플레이, 드론 등 첨단 산업뿐만 아니라 소재·부품·장비 산업으로도 귀결된다는 것을 절실히 깨닫게 되었습니다.
2018년 기준 대일 무역적자 241억 달러 중 약 90%에 해당하는 224억 달러가 소재·부품·장비에서 발생했음을 고려한다면 이들 분야에서 세계적인 경쟁력을 확보하지 못할 경우 현재의 위기상황은 지속될 수밖에 없습니다.
세 번째는, 소재·부품·장비 분야의 기술혁신을 위해서는 10년 이상 20년에 이르는 장기적인 연구개발과 투자 및 ‘과학 장인(匠人)’의 정신이 필요하다는 것을 기업경영자와 국가정책 입안자와 정치인들이 비로소 깨닫게 된 계기가 되었습니다.
저는 지난 8월 모 일간지와의 인터뷰와 10월 국회 토론회에서 소재·부품·장비 분야의 장기적인 연구개발 필요성을 강조했습니다. 일본 수출규제 직후 단기간 해결을 공언했던 분위기는 최근 확연히 달라졌으며, 이제는 정관계 주요 인사들을 만나보면 한결같이 현재의 위기 극복을 위한 소재·부품·장비 기술혁신이 1~2년 이내에 달성하기 어렵다는 제 의견에 동의하십니다.
제가 『KAIST 소재·부품·장비 기술자문단』을 출범시킨 이후에 별도로 「KAIST 신소재연구기획단」을 발족한 이유는 두 가지를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첫째, 첨단산업에서 소재의 비중은 점차 확대되고 있으며 소재 강국이 글로벌 산업을 주도할 것으로 예상되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3D 프린팅 산업의 경우 프린터 장비의 글로벌 시장은 약 19억 달러 규모지만 3D 프린팅에 활용되는 소재의 시장 규모는 26억 달러에 이릅니다.
제조업에서 기기와 장비 기술의 혁신도 필요하지만, 3D 프린팅 산업의 경우와 같이 소재의 비중과 중요성은 향후 더욱 부각될 것입니다.
둘째, 소재 개발은 장기적인 연구와 투자가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2014년 일본에 노벨 물리학상을 안긴 청색발광다이오드(LED)는 1세대 학자인 아카사키 이사무 교수의 연구를 2세대 학자인 히로시 아마노 교수가 이어받아 일구어낸 성과로서, 대를 이어 30여 년간 나고야 대학에서 수행한 기초연구의 결과를 니치아화학이라는 중소기업이 이어받아 상용화에 성공시킴으로써 세상을 바꾸는 신기술 탄생이 가능했습니다.
유기발광다이오드(OLED) 디스플레이 기술의 경우 美 이스트만 코닥연구소(Eastman Kodak)의 Ching W. Tang 박사가 1987년 다층 유기박막을 발광소자로 제안한 논문을 발표한 이후 20여 년에 걸친 상용화의 노력을 통해 비로소 새로운 디스플레이 기술개발로 이어졌습니다.
결국, 과학기술혁신을 위해서는 단기간의 연구 성과 창출을 강조하던 기존 접근방식을 지양하고 장기적인 연구개발을 장려하는 파라다임의 전환(Paradigm Shift)을 위한 노력이 각 분야에서 절실히 필요합니다.
이러한 변화의 노력을 소재 분야에 적용해 긴 호흡의 연구를 수행하고 그 성과를 기업과 공유함으로써 우리나라가 소재 기술 분야의 ‘Fast follower, 빠른 추격자’에서 ‘Global first-mover, 글로벌 선도자’로 도약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하고자 「KAIST 신소재연구기획단」을 출범시켰습니다.
KAIST는 대학사회에서 과학기술혁신을 선도하는 ‘Global first-mover’가 되기 위해 장기적인 연구를 확대하고 있으며, 이를 위해 시행 중이거나 준비하고 있는 제도를 소개해 드리고 싶습니다.
우선, 세대를 초월한 협업 연구 수행을 통해 시니어 교수의 학문적 유산이 주니어 교수를 통해 계승·발전될 수 있는 기틀을 마련하고자 국내 최초로 ‘초세대 협업 연구실’ 제도를 도입해 시행 중입니다.
또한, 선정된 연구과제에 최초 3년간 평가를 면제하고 최장 10년까지 연구비를 지원하는 ‘글로벌 특이점 연구사업(Global Singularity Project)’을 출범했습니다. 올해 처음 선정된 2개의 글로벌 특이점 연구과제 중 하나는 오늘 회의에 참석하신 홍승범 교수님의 ‘카이스트 신소재 혁명: M3I3 이니셔티브’입니다.
이와 더불어, 내년 초에는 ‘특이점 교수(Singularity Professor)’ 제도를 도입할 예정입니다. 글로벌 난제 해결에 도전하거나 새로운 학문 분야를 개척하려는 교수님들을 장기적으로 지원하는 제도며, 특이점 교수로 선정된 교원에게는 최소 10년, 길게는 20년간 매년 업적 평가 없이 기본연구비를 제공할 것입니다.
소재 분야의 장기적인 연구 및 투자의 필요성과 이를 기반으로 한 「KAIST 신소재연구기획단」의 설립 취지에 관해 기업인 여러분의 공감과 성원을 당부드립니다.
이 자리를 빌려 「KAIST 신소재연구기획단」의 성공적인 운영을 위해 필요한 세 가지 전략을 제안하고 싶습니다.
첫째, 선택과 집중의 전략이 필요합니다.
주지하시는 바와 같이 현재 우리나라의 총 연구개발 투자 규모는 GDP 대비 약 4.5%로 투자 비율 측면에서는 세계 1위입니다. 하지만 연구개발 투자액의 절대 규모 면에서는 미국 1/8, 중국의 1/4, 일본의 1/2 수준에 머물고 있습니다.
마침 오늘 발표된 정부의 내년도 예산을 살펴보면 소재·부품·장비 관련 예산의 대폭 증액이 가장 눈에 띄는 특징입니다. 소재·부품·장비 경쟁력 제고를 위해 올해 대비 약 2배 증액된 1조 2,780억 원의 예산 투입이 확정되었으며, 이 중 소재·부품·장비 연구개발 지원을 위해 책정된 예산도 올해 대비 120% 증액된 3,396억 원으로 확정됐습니다.
하지만, 단일 소재 개발에 수십억 원의 연구개발 예산이 소요되는 사례를 감안하고 일본의 수출규제 조치로 영향을 받게 된 분야의 범위를 함께 고려한다면 1,200여 개 분야 전부를 포괄하기에는 여전히 충분하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KAIST 신소재연구기획단」은 중점 기술 분야를 선정한 후 한정된 연구자원을 집중적으로 투입해야 합니다.
오늘 발표될 7대 핵심 소재 분야는 그간 「KAIST 신소재연구기획단」참여 교수님들을 중심으로 원천·세계 최고기술 보유 여부, 향후 10년 이내 핵심 소재 기술로 발전 가능성 등의 기준을 적용해 선정되었습니다.
이어질 분과별 토의 시간에는 선정된 기술 분야별 참석하신 기업 관계자분들의 의견을 청취하고 글로벌 시장 성장잠재력과 연구개발 전문 인력 확보 여부 등을 종합적으로 고려해 핵심적인 추진 분야를 확정해 주시기 바랍니다.
둘째, 세계 최고(Best)이거나 최초(First)이거나 유일한(Only) 연구 성과를 창출하는 소위 B·F·O 연구를 추구해야 합니다.
앞서 말씀드린 것처럼 소재 분야의 연구 역시 승자독식(Winner takes all.)의 원칙이 적용되기 때문에 2등이나 3등의 기술은 의미가 없다는 점을 염두에 두며 B·F·O 연구에 매진해 주십시오.
셋째, 산학 협업을 확대·강화해야 합니다.
우리나라 박사급 연구 인력의 약 82%는 대학과 연구소에서 근무하고 있으며, 중소·중견기업 부설 연구소에서는 출신 대학을 불문하고 박사급 연구 인력을 찾아보기 힘든 것이 안타까운 현실입니다.
점차 심각해지고 있는 연구 인력과 자원의 편중 현상을 해결하지 못한다면 기업은 대학이 기초와 응용 연구를 통해 개발한 기술을 상용화하는 과정에서 도사리고 있는 ‘악마의 강(Devil’s River)’과 ‘죽음의 계곡(Valley of Death)’ 같은 어려운 단계를 극복할 수 없습니다. ‘KAIST 신소재부품 산학협의체’와 같은 산·학의 긴밀한 연결고리를 마련하는 것이 중요한 이유도 이러한 측면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지난 10월 저는 ‘KAIST-중소벤처기업부 간담회’를 가지면서 중기부 장관님께 대학과 기업의 공동연구를 활성화하고 이를 통해 창출된 기술의 사업화를 가속화시키기 위한 ‘(가칭)캠퍼스 연구소’ 제도의 추진을 제안했으며 조만간 관련 정책과 사업이 마련될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소재 분야에서 산·학의 협업 못지않게 중요한 것은 중소·중견기업과 대기업의 상생협력입니다.
특히, 대기업은 소재와 부품 등을 공급하는 중소·중견기업이 기술을 개발하면 이를 실증하는 테스트베드(시험장) 역할을 맡아야 하며, 이를 통해 우수한 기술이 사장되는 것을 방지할 뿐만 아니라 중소·중견기업이 세계 시장을 장악할 최고의 기술을 개발할 동기와 기회를 부여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러한 방안을 포함해 소재 분야를 중심으로 대기업과 중소·중견기업의 상생을 위한 논의가 오늘 회의를 통해 함께 진행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나라는 반세기 전 국민소득이 북한보다 낮은 300달러에 불과했으나 이후 세계적으로 유례를 찾을 수 없을 만큼 경이적인 국가 발전을 이룩하며 국민소득 3만 달러 시대에 진입했습니다.
4차 산업혁명 태동기를 맞이해 우리는 다시 한 번 기적을 이룰 것인지 아니면 중진국의 트랩에 갇히고 말 것인지를 결정하는 중대한 기로에 서 있습니다.
‘KAIST 신소재부품 산학협의체’와 같은 산·학 협업의 고리를 통해 여러분의 헌신과 열정과 혁신이 결실을 맺게 된다면 이를 소중한 밑거름으로 삼아 우리나라가 한 단계 더 도약해 선진국으로 진입할 수 있을 것이라는 확신에 찬 희망을 품습니다.
다시 한 번 여러분을 환영하며, 오늘 이 자리를 통해 소재 분야 산업혁신을 위한 중지(衆智)를 모으고 이를 실현하기 위한 KAIST의 역할에 대한 제언과 국가 정책적 건의 사항을 발굴하는 의미 있는 시간이 되시길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2019. 12. 11.